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자 지구 (문단 편집) === 이슬람 시대 =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 -5px" [[파일:가자 모스크 1.jpg|width=100%]]}}} || || 가자 대모스크[* 다마스쿠스 우마이야 사원과 마찬가지로 다신교 사원, 기독교 성당, 이슬람 사원의 과정을 거쳤다.] || 팔레스티나 프리마의 남부 해안에서 정치,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였던 가자에는 7세기 들어 [[메카]]의 아랍 상인들이 왕래가 잦아졌다. 그 중엔 이후 칼리파로 즉위하는 [[우마르]] 이븐 알 카타브도 있었고, [[무함마드]] 역시 젊은 시절 대상단의 일원으로써 한 두 차례 가자를 방문하였다. 이미 630년경 가자에는 소수의 무슬림 개종자들이 있었으며, 634년 레반트 정복에 나선 [[이슬람 제국]]의 명장 [[아므르 이븐 알 아스]]가 도시를 포위하였다. 하지만 일전의 아즈나딘 전투의 승리에도 굴하지 않은 가자 수비대가 시내의 유대인 공동체의 협조와 함께 완강히 저항하며 포위는 장기화되었고[* 이는 아직 이슬람 군대가 공성전에 미숙했던 탓도 있다], [[야르무크 전투]]로 판세가 결정난 후인 637년 여름 가자는 3년의 저항 끝에 함락되었다. 아므르는 동로마 수비대를 학살하였지만 주민들은 건들지 않았다. 강한 저항에도 나타난 상대적 관용은 이미 주민들 중 일정 부분이 아랍계였던 것과, 가자의 상인이었던 무함마드의 조부 하쉼 이븐 압두 마나프가 묻힌 곳이라 여겼던 것 때문이라 한다. 다만 세례자 요한 성당은 대사원으로 개조되었고, 애초에 기독교에 크게 감화되지 않았던 가자의 주민들은 쉽고 빠르게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. 라쉬둔-우마이야-압바스 제국기에 가자는 필라스틴 군구 (준드 필라스틴)에 소속되었고 중소 도시로 남았다. 672년 가자는 지진을 겪었고, 723년 도시를 방문한 성 윌리왈도는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이 [[지즈야]]를 내고 신앙과 상업 활동을 이어간다고 기록하였다. [[압바스 왕조]]기인 767년 가자에선 순니 4대 법학파 중 하나인 [[샤피이파]]를 세우게 될 대학자 무함마드 이븐 이드리스 앗 샤피가 출생하여 유년기를 보내었다. 796년 가자는 현지 아랍 부족들 간의 내분으로 파괴를 겪었지만 곧 회복되었고 9세기 페르시아인 지리학자 이스타크리는 '이곳이 히자즈 인들에게 있어 훌륭한 시장이었기에' 상인들이 부유해졌다고 기록하였다. 867년 익명의 기독교도 작가는 가자를 모든 것에 있어 풍족한 곳이라고 평하였다. 하지만 이는 대부분 히자즈-시리아 대상 무역에 의한 것이었고, 아랍인들의 도래 이후 지중해 무역은 쇠락하고 항구는 사실상 방치되었다. 그리고 9세기 말엽 압바스 중앙 정부의 약화 함께 현지 아랍/베두인들의 내분과 도적화로 내륙 무역마저 불안정해지며 도시는 점진적인 쇠퇴에 들어갔다, 한편 943년에는 인도로부터 오렌지가 전래되었다. 977년 가자와 팔레스타인 일대는 쉬아 [[파티마 왕조]]의 영토가 되었다. 8년 후 가자에 당도한 아랍 지리가 알 무캇다시는 '사막 끝자락 이집트로 향하는 가도 상에 놓인 큰 도시로, 아름다운 모스크가 있으며 칼리파 우마르의 기념물 역시 볼 수 있다'는 기록을 남겼다. 한편 1049년 가자에선 아랍 시인 아부 이샤크 이브라힘 알 가지가 출생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